[천지인뉴스] 트럼프 관세 압박의 역설…EU, 인도·남미와 초대형 FTA 체결하며 새 경제질서 가속
정범규 기자

미국의 관세 압박 속에서 유럽연합이 인도와 대형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30년 넘게 표류하던 남미 4개국과의 협정도 연이어 타결됐다.
동맹을 향한 보호주의가 오히려 미국 중심 질서를 흔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의 관세 압박에 직면한 유럽연합이 인도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합의하며 글로벌 경제 지형 변화의 중심에 섰다. 협상을 시작한 지 무려 19년 만에 이뤄진 이번 타결은 단순한 통상 합의를 넘어, 미국 주도의 기존 무역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유럽의 전략적 전환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평가된다.
이번 협정으로 유럽연합과 인도는 인구 약 20억 명, 전 세계 국내총생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초대형 경제권을 형성하게 됐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인도와의 협력은 유럽 경제에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는 동시에, 미국 시장 의존도를 낮추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협정 타결 직후 “무역과 안보, 사람 간의 유대 관계에 관한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고 밝혔다. 단순한 관세 인하를 넘어 정치·안보 협력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공식화한 것이다.
협정에 따라 인도는 유럽산 내연기관 자동차 관세를 기존 110%에서 10%로 대폭 인하하고, 와인 관세 역시 150%에서 20%까지 낮추기로 했다. 유럽 입장에서는 고관세 장벽으로 막혀 있던 거대 소비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중심 외교가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은 지난해 유럽연합을 상대로 25% 관세를 부과하며 동맹국에까지 강경한 압박을 가했고, 이후에도 그린란드에 파병한 유럽 8개국을 상대로 다시 25% 관세를 언급하며 갈등을 키웠다.
동맹이라는 개념보다 거래와 압박을 앞세운 미국의 태도는 유럽으로 하여금 미국 외의 시장을 시급히 모색하게 만들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무역이 갈수록 무기화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의존도를 줄이기로 했다”고 밝혀, 이번 인도 FTA가 미국 리스크 관리 차원임을 분명히 했다.
EU와 인도는 이번 협정을 통해 해양 안보와 대테러 협력을 포함한 국방·안보 협정도 함께 체결했다. 경제 협력을 넘어 지정학적 연대까지 확장된 것으로, 미국 중심 안보 질서에도 미묘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 재무당국은 인도가 러시아산 석유를 대량 수입하고 있다며, 유럽이 사실상 러시아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러한 미국의 문제 제기를 자국 통상 전략의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의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농민들의 반발로 30년 가까이 표류하던 남미 4개국과의 자유무역협정도 최근 전격 타결됐다. 내부 반대까지 감수하면서 시장 다변화를 선택한 것은 미국 의존 구조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또한 필리핀과 아랍에미리트 등과의 자유무역협정 협상도 동시에 추진 중이다. 유럽연합이 단기간에 다수의 대형 통상 협정을 연쇄적으로 성사시키는 것은 이례적이며, 그만큼 위기의식이 강하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 강화가 결과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한다. 동맹국을 향한 관세 위협이 반복될수록 각국은 미국을 우회하는 경제 네트워크 구축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캐나다와 영국이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유럽이 인도·남미와 손잡는 흐름은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이 스스로 국제경제의 중심에서 한 발 물러나는 사이, 세계는 다극 경제 질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EU의 행보는 미국의 압박이 반드시 복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연합과 질서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관세를 외교 무기로 삼은 트럼프식 통상 전략이 결국 미국의 고립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국제경제의 새판짜기는 이미 시작됐다. 동맹을 향한 위협이 반복될수록 세계는 미국 중심의 단일 축에서 벗어나 보다 복잡하고 분산된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그 변화의 출발점에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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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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