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세안 FTA 개편 협상 본격화…디지털·공급망 중심 ‘신통상 질서’ 구축 시동 [천지인뉴스]
정범규 기자
한-아세안 FTA 업그레이드 위한 첫 공동위원회 개최
디지털·핵심광물·공급망 중심 협상 구조 본격 설계
보호무역 확산 속 미래 산업 대응 위한 통상 전략 전환

한국과 아세안(ASEAN)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기 위한 협상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기존의 단순 시장 개방 중심 협정을 넘어 디지털, 공급망, 핵심광물 등 미래 산업과 직결된 ‘신통상 규범’을 반영하는 방향으로의 구조적 전환이 핵심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일 한국과 아세안 간 FTA 개선을 위한 제1차 공동위원회를 화상으로 개최하고, 향후 협상 추진의 기본 틀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에는 우리 측과 아세안 측 대표단 약 40여 명이 참여해 협상 운영 방식과 분과 구성 등 실질적인 협상 준비 단계에 돌입했다.
한-아세안 FTA는 2007년 발효 이후 양측 간 교역과 투자 확대의 핵심 기반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기존 협정이 상품과 서비스 시장 개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최근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특히 디지털 경제, 공급망 안정성, 핵심 자원 확보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존 협정 체계로는 대응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양측은 지난해 정상회의를 계기로 FTA 개선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했고, 이번 공동위원회를 통해 협상의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들어갔다. 오는 6월로 예정된 본격적인 분과 협상을 앞두고 협상 규칙과 구조를 사전에 정비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번 개편 협상의 가장 큰 특징은 ‘신통상 규범’ 중심 재편이다. 디지털 분야에서는 데이터 이동과 전자상거래, 디지털 투자 환경을 포함하는 고도화된 규범 도입이 추진된다. 이는 단순한 무역 확대를 넘어 디지털 경제 기반 자체를 공동으로 구축하는 ‘디지털 고속도로’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핵심광물 분야 역시 주요 협상 축으로 부상했다. 전기차,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필수 원료 확보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베트남의 희토류, 인도네시아의 니켈 등 아세안 지역 자원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전략이 포함됐다. 이는 단순한 교역 확대를 넘어 공급망 안정성과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경제안보 측면까지 고려된 접근이다.
공급망 분야에서는 글로벌 교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 체계 구축이 핵심 과제로 설정됐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위기 발생 시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이와 함께 그린경제, 지식재산권, 비관세 장벽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협상이 병행될 예정이다. 이는 단순히 무역 장벽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 기업 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을 재설계하는 작업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이번 협상을 통해 인공지능(AI), 전기차 등 미래 핵심 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통상 기반을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특히 최근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공급망 불안정성 증가라는 글로벌 환경 변화 속에서, 아세안과의 협력을 전략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반영됐다.
이번 FTA 개편은 단순한 협정 수정이 아니라, 한국 통상 정책의 방향 전환을 상징하는 신호로도 해석된다. 기존의 ‘시장 개방 중심’에서 ‘경제안보·산업전략 연계형 통상’으로의 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향후 협상 과정에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세부 쟁점 조율이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디지털 규범 수준, 핵심광물 접근 조건, 공급망 협력 방식 등은 국가별 전략과 직결되는 만큼 협상 난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협상은 글로벌 통상 질서 재편 흐름 속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평가된다. 아세안이라는 성장 잠재력이 높은 시장과의 협력 구조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미래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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