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43화. 눈물로 풀린 자개장, 저승길을 열다 (에피소드 최종 완결)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43화. 눈물로 풀린 자개장, 저승길을 열다 (에피소드 최종 완결)

침대 구석에서 피어오른 음기는 점차 머리를 산발한 초라한 할머니의 형상으로 굳어졌다. 노인의 영혼은 김 법사의 시퍼런 신장칼과 서슬 퍼런 신위에 압도당해 이빨을 득득 갈면서도, 남편의 덜미를 쥔 보이지 않는 손을 차마 놓지 않으려 발악했다. 일반인인 새댁의 눈에는 그저 안방 구석의 공기가 서늘하게 일렁이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김 법사의 눈은 이미 영가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내 가구다… 내 물건이야! 아무도 손대지 마라! 이놈들이 감히 내 소중한 걸 버리려고 해!”
이때, 김 법사의 눈앞으로 신령님이 내린 화경(火鏡)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펼쳐졌다. 장롱에 맺힌 할머니의 한 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이 집으로 시집와 평생을 시댁과 남편을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거친 밭일을 도맡아 하며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고, 병든 늙은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수발했다. 심지어 남편의 줄줄이 딸린 남동생과 여동생들을 자식처럼 뒷바라지해 가며 다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남편이라는 인간은 고생하는 아내를 등한시한 채 평생 기집질에 도박을 일삼았고, 술만 먹으면 가재도구를 때려 부수며 폭행을 일삼았다. 그러다 서방이라는 자가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죽기 얼마 전, 평생 처음으로 미안했는지 시장 구석에서 안방에 두라며 자개농 작은 것 한 통을 사다 준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그 자개장은 평생의 고생과 서러움 속에서 유일하게 받아본 남편의 ‘마음’이자, 자신의 고달픈 인생 전체를 증명하는 유일한 보물이었다. 자식들은 그 사연도 모른 채 노모가 죽자마자 쓰레기 취급하며 버렸으니, 영혼이 눈이 뒤집혀 가구에 달라붙은 것이 당연했다.
김 법사는 화경을 거두고, 옆에서 하얗게 질려 있는 새댁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할머니의 지나간 인생과 사연을 차분히 전해주었다. 무당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망자의 기막힌 사연을 전해 들은 새댁은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을 펑펑 흘렸고, 김 법사 역시 애처로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 법사는 신장칼을 천천히 거두고, 노인의 원혼을 향해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달랬다.
“영가시여, 서러운 세월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그 깊은 마음을 알았으니 무당의 신용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저 자개장은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환경미화원들이 오면, 내가 이 새댁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약소하게나마 담뱃값과 수고비를 꼭 쥐어주게 할 터입니다. 다른 데 거치지 않고 소각장소로 직접 가져가서 깨끗하게 태워달라 신신당부할 테니, 산 사람의 손때 묻지 않게 영가시여의 곁으로 온전히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가구에 대한 집착과 이승의 한을 내려놓고 편안히 저승길로 향하소서.”
진심 어린 김 법사의 다짐에 노인의 원혼은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더니, 이내 굳게 쥐고 있던 남편의 목덜미를 스르륵 놓아주었다. 한이 풀리자 악귀처럼 사납던 노인의 눈빛에 미안함이 서렸다. 노인은 김 법사의 입을 빌려, “그간 뜻하지 아니하게 새댁 신랑을 괴롭혀서 미안하다”는 마지막 말을 세상에 남겼다.
이어 노인은 구천을 떠돌던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바른 길을 열어준 김 법사를 향해 감사의 표시로 정중하게 삼배(三拜)를 올렸다. 삼배를 마친 깨끗한 망자의 영혼은 이윽고 하얀 연기가 되어 안방 창문 너머로 잔잔하게 흩어지며 천도(薦度)되었다.
노인이 물러가자마자 김 법사는 지체 없이 품에서 미리 준비해 간 ‘동토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대문 밖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자개장의 정중앙에 부적을 단단히 붙였다.
파아아앗-
부적이 붙는 순간, 가구 표면을 감싸고 있던 거뭇거뭇한 음기와 살기가 하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완벽하게 소멸했다. 내일 올 환경미화원들이 다치지 않도록 동토살을 완벽하게 꺾어놓은 것이다.
부적을 붙이고 안방으로 돌아오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침대 위에서 발작하며 40도를 넘나들던 남편의 고열이 거짓말처럼 뚝 떨어져 있었다. 뻣뻣하게 굳어 마비되었던 팔다리에 온기가 돌며 사내가 깊고 편안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김 법사는 안도하는 새댁을 바라보며 무겁고 진지하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새댁, 신랑은 이제 살았으니 안심하셔요. 다만 무당이 신령님 전에서 한 약속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뒤탈이 없는 법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환경미화원들이 오면, 그냥 보내지 말고 꼭 붙잡으셔요.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생전 끔찍이 아끼시던 자개장이니, 다른 폐기물들과 섞지 말고 소각장소로 직접 가져가서 곧바로 소각해 달라고 수고비와 경비를 정중하게 지급하며 부탁하십시오. 그렇게 서방의 손으로 직접 소각장까지 가게 처리를 해드려야 할머니가 이승에 남은 한을 티끌 하나 없이 다 풀고 저승에서 편히 쉬시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예, 법사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화원분들께 정중히 부탁드려 소각장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새댁은 남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며 김 법사에게 연신 머리를 숙였다. 큰돈 들이지 않아도 신령님의 비방과 망자를 향한 진심이 있으면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법이었다.
하동 도량으로 돌아가는 김 법사의 발걸음 위로 밤하늘의 은하수가 유난히 맑게 빛나고 있었다. 돈 한 푼에 눈멀지 않고 오직 사람을 살리고 망자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계룡산 벼락신장의 자비로운 신력은, 또 한 번 이승의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혀내었다.
(에피소드 완결)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