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천지인 영감/연재 소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33화. 마당을 가른 호령, 베일을 벗은 지박령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33화. 마당을 가른 호령, 베일을 벗은 지박령

지리리링-

지리산 자락을 휘감는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고 점상 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어제 다녀간 민우 어머니였다. 서둘러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잔뜩 긴장한 여인의 숨소리가 거칠게 새어 나왔다.

“법사님… 저, 지금 하동 읍내 지나서 법당 쪽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 가고는… 가고는 있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양인지 달리는 차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하지만 여인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안절부절못함이 수화기를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삼십 년 무업(巫業)의 연륜이 그 짧은 침묵 속의 행간을 놓칠 리 없었다. 지박령에게 장악당해 가는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귀신 눈치를 보며 신당으로 향하는 그 가시방석 같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예, 어머니. 내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천천히 조심해서 오십시오. 마당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짧고 묵직한 대답으로 여인의 불안을 달래준 뒤 전화를 끊었다. 김 법사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는 가사 장삼을 정돈한 뒤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햇살은 맑았지만, 천신장군암 마당을 감싸고 도는 공기는 유독 을씨년스러웠다. 도량 끝에 우뚝 솟은 대나무 장대의 붉은 깃발이 마치 다가올 싸움을 예고하듯 거칠게 파닥였다. 도착할 시간에 맞춰 마당 한구석에 가만히 서서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이윽고 저 멀리 굽이진 산길을 따라 백색 승용차 한 대가 엔진 소리를 쿨럭이며 힘겹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쇠사슬이 차 뒤편을 꽉 붙잡고 늘어지는 형국이었다.

끼이익-

마침내 차가 자갈 깔린 도량 마당으로 들어서며 멈춰 섰다. 하지만 시동이 꺼진 후에도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짙게 선팅 된 앞 유리를 투영해 보니, 차 안에서 모자가 격렬하게 실랑이를 벌이는 실루엣이 고스란히 비쳤다. 어머니는 울먹이며 내리자고 애원하고 있었고, 조수석의 민우는 차 손잡이를 꽉 쥔 채 온몸으로 버티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벼락신장의 도량이 뿜어내는 정골한 신기(神氣)에 아이 몸속의 잡귀가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였다. 민우가 조수석 문을 컥 열고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김 법사의 신안(神眼)에 민우의 등 뒤를 악착같이 짓누르고 있는 형체가 똑똑히 박혀왔다. 고3 짜리 파릇파릇한 아이의 어깨 위로, 때가 꼬질꼬질하게 탄 삼베옷을 걸친 비쩍 마른 할아버지 형상의 지박령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눈이 뒤집힌 노인의 손톱이 민우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당장이라도 아이의 명줄을 끊어놓을 듯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 흉측한 독종 잡귀가 아이의 눈과 귀를 가리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신당 문을 넘게 하면 아이의 영(靈)이 먼저 깨질 판이었다. 김 법사는 단전에서부터 벼락신장의 기운을 끌어올려 대지를 흔들 듯 공중을 향해 날카로운 호령을 내질렀다.

“어디라고 감히 신령님 전 도량에 발을 디디느냐! 이 더럽고 잔인한 악귀 놈아, 당장 그 가련한 육신에서 손을 떼지 못할까!!!”

하늘을 가르는 듯한 거친 고함과 함께 김 법사가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매섭게 내리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벼락이 마당 한복판을 내리친 듯한 파장 삼아, 민우의 등 뒤에 붙어 있던 할아버지 지박령이 단번에 수 미터 뒤로 나자빠지며 쇳소리 같은 비명을 질렀. 끄아아악!

일시적으로 귀신의 장악이 풀리자, 민우는 서슬 퍼런 벼락신장의 기운에 압도당한 듯 멍한 눈빛으로 터덜터덜 신당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귀신을 제압하는 천신장군의 위엄에 본능적으로 이끌린 것이다.

신당 안, 알싸한 향취가 감도는 법당 바닥에 민우와 어머니가 마주 앉았다. 방금 전까지 발악하던 민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넋이 나간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 법사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질문을 던졌다.

“민우 군, 고생 많았다. 이제 안심해도 좋다. 그날… 그 흉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있는 그대로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법사의 인자한 목소리에 마음의 빗장이 풀린 것일까.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단 한 번도 부모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그날 밤의 기억을 힘겹게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그날… 친구들하고 인터넷에서 유명하다는 시골 폐가에 재미 삼아 들어갔어요. 그냥 담력 훈련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앞을 지나갈 때였어요. 갑자기… 갑자기 등 뒤에서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확 끼치면서, 누군가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것 같은 싸늘한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친구들하고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나왔는데… 그때부터였어요. 그날 이후로 자꾸 늙은 노인 목소리가 제 귀에서 떠나지 않아요…”

이야기를 마친 민우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지독한 지박령과의 조우, 그 구체적인 실체가 드디어 천신장군암의 불빛 아래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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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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