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인뉴스] 영화 ‘암살자(들)’에 정치권 압박 확산…영화인들 “관객의 판단을 정치가 대신하지 말라”
[천지인뉴스] 영화 ‘암살자(들)’에 정치권 압박 확산…영화인들 “관객의 판단을 정치가 대신하지 말라”
정범규 기자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이 정치권의 상영 철회 요구와 제작 관계자에 대한 압박 문제로 확산하자 영화인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정지영·이명세 감독 등 영화인 20여 명은 부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권이 영화의 의미를 미리 규정하거나 관객의 선택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

특히 국민의힘이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측에 ‘암살자(들)’의 개막작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적 논쟁이 해외 영화제의 독립적인 상영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영화인들은 작품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상영과 관람 기회 자체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논란은 특정 영화에 대한 찬반을 넘어 표현의 자유와 문화예술의 자율성, 관객의 판단권을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인들은 작품의 완성도나 역사적 진실성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영화에 대한 평가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을 위해 부산을 찾은 영화인들은 8일 오전 부산 해운대 이벤트광장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는 정지영·이명세·김홍준 감독을 비롯해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윤성은 영화평론가, 백재호 감독, 전찬일 영화평론가 등 여러 세대와 직군의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공동입장문을 통해 영화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지만, 최근 상황은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 정치적 압박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논란은 영화 제작진과 배우뿐 아니라 제작사, 투자기관, 공공기관, 극장, 학교의 단체관람, 해외영화제의 상영 결정 문제로까지 번졌다.
영화인들이 특히 문제 삼은 것은 정치권의 개입이 실제 영화의 상영과 관람 기회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은 지난 6일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암살자(들)’의 개막작 선정 철회를 촉구했다.
국내에서 제기된 역사 왜곡 논란을 근거로 해외 영화제에 작품 상영을 재검토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7일 공식 입장을 통해 독립적인 작품 선정 절차에 따라 결정한 개막작을 예정대로 상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영화제는 외부 논란과 관계없이 관객에게 다양한 이야기와 관점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영화제의 역할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비판과 상영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은 구분돼야 한다는 영화계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정치권이 특정 작품의 역사적 해석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반대가 영화제의 작품 선정 철회 요구나 상영 중단 압박으로 이어질 경우 문화예술의 자율성과 충돌할 수 있다.
영화인들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일수록 다양한 해석과 비판이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지영 감독은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역사가 남긴 의문에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영화감독을 비롯한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가 기존의 해석과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다.
이명세 감독 역시 창작활동이 외부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며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번 사태에서는 영화 관계자들의 신변 안전 문제도 제기됐다.
영화인들은 논쟁 과정에서 관계자 개인의 신상이 공개되고 주거지와 일상이 침해되는 것은 물론 협박과 신변 위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작품에 대한 비판과 개인에 대한 협박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이나 영화적 표현에 대한 비평은 정당한 공론의 영역이다. 그러나 창작자와 관계자의 일상을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공공기관과 투자기관을 향한 정치적 문제 제기 역시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근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공적 자금의 집행과 지원 절차에 대한 감시는 필요하지만,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관계 기관에 압력을 행사한다면 문화예술 지원의 독립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암살자(들)’과 관련해 예정됐던 무대인사 등 관객 대상 행사가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행사 취소의 구체적인 결정 경위와 정치권의 요구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번 사안에 대해 별도의 공식 입장을 내지 않은 점도 기자회견에서 거론됐다.
이명세 감독은 이번 기자회견이 특정 단체의 일방적인 주도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영화인들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대응에 대해서는 영화제가 끝난 뒤 영화인들이 충분히 논의하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홍준 감독도 긴급하게 마련된 기자회견의 취지에 공감해 참여했다며 영화제 이후 관련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인들이 이날 강조한 것은 작품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었다.
‘암살자(들)’의 역사적 해석이 타당한지, 영화적 완성도가 충분한지, 특정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없는지는 관객과 비평가, 역사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작품의 의미를 먼저 규정하고 영화제나 극장에 상영 철회를 요구하는 방식은 그 논의 자체가 이뤄질 기회를 좁힐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이 문화예술의 제작과 유통, 상영 과정에 작용할 경우 창작자들이 향후 논쟁적인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데 부담을 느낄 가능성도 있다.
영화인들은 공동입장문에서 특정 영화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영화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수 있다. 다만 그 논쟁의 결론을 정치권이 대신 내리거나 공적 권한을 통해 상영과 관람의 기회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별도로 검증돼야 한다.
이번 사태가 남긴 핵심 질문은 분명하다. 역사적 논쟁이 있는 작품을 시민들이 직접 보고 평가할 기회를 보장할 것인지, 아니면 정치권의 판단이 그 기회에 앞서 작동하도록 둘 것인지의 문제다.
문화예술의 자유는 논쟁이 없는 작품에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논쟁적인 작품도 공개적인 비판과 검증의 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기자회견에 참여한 영화인들의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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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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