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천지인 영감/연재 소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뱀꿈에 갇힌 부부]제25화. 자시의 청배, 두 사람의 길을 열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뱀꿈에 갇힌 부부]

제25화. 자시의 청배, 두 사람의 길을 열다

유진이 돌아간 뒤 저녁이 깊어지자 마을은 금세 조용해졌다.

낮에도 사람을 자주 마주치기 어려운 동네였다.

해가 지고 논밭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던 불빛까지 하나둘 꺼지고 나면 농수로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와 집 뒤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저녁을 일찍 마치고 자시 축원을 준비했다.

유진이 적어놓고 간 부산 주소를 신명 앞에 두었다.

그 옆에는 유진과 정환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각각 적었다.

오늘 할 일은 큰 굿이 아니었다.

굿상을 크게 차리지도 않았고 사람을 불러 굿판을 벌일 생각도 없었다.

신령님 전에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촛불을 밝힌 뒤, 두 사람 사이에 오래 막혀 있던 것이 풀리기를 축원하는 자리였다.

먼저 향로의 재를 고르고 촛대를 닦았다.

맑은 물을 새로 떠 올리고 과일과 떡도 조금 마련했다.

나는 제물을 많이 차리는 것이 정성의 크기를 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얼마나 올렸느냐보다 누구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비느냐가 더 중요했다.

준비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집 뒤 칠성탑 쪽으로 걸어갔다.

돌로 쌓은 탑은 어둠이 내려앉자 낮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산 위로 별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서걱.

마른 잎끼리 스치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번졌다.

나는 칠성탑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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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을 찾아왔을 때 그 여자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지만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점사를 풀어갈수록 그보다 앞서 시작된 문제가 하나씩 드러났다.

반복되는 뱀꿈.

남편에게서만 느껴진다는 비린내.

남편의 손길을 뱀이 몸을 훑는 듯 받아들이는 거부감.

그리고 뒤늦게 확인된 정환 집안의 오래된 뱀잡이 내력.

“칠성님 전에 고합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시간 부산에 사는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다시 잡아보려 합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윗대에 묵은 것이 있다면 산 사람에게 더는 짐이 되지 않게 거두어주시고, 풀어야 할 것이 있다면 풀 길을 열어주십시오.”

짧게 예를 올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자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신명을 모신 안쪽 방의 문을 닫았다.

향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촛불을 밝히고 신명 앞에 앉았다.

유진과 정환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다시 확인했다.

부산 주소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대신방울을 들었다.

짤랑.

첫 방울이 울렸다.

한밤중이라 그 소리가 낮보다 훨씬 선명했다.

짤랑.

다시 방울을 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신령님 전에 고했다.

“오늘 병신년 ○월 ○일 자시를 맞아 천신장군암에서 신령님 전에 고합니다.”

방울을 내려놓고 북채를 잡았다.

둥.

낮은 북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둥.

다시 한번 북을 울렸다.

꽹과리도 함께 받쳤다.

깽.

짧은 쇳소리가 북소리 사이를 갈랐다.

나는 장단을 빠르게 몰아가지 않았다.

오늘은 신명을 흥겹게 놀리는 굿판이 아니었다.

청하고,

고하고,

비는 자리였다.

북을 치며 축원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일월성신 칠성제석 천신장군 신장대감 전에 고하옵니다.”

둥.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하고 먼 부산 땅에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을 올립니다.”

둥.

“정환과 유진, 두 사람 부부의 연을 굽어살펴주십시오.”

꽹과리가 다시 울렸다.

깽.

“살아 있는 사람이 지은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풀게 하시고, 죽은 이가 남긴 묵은 것은 죽은 이의 자리로 거두어주십시오.”

북소리가 낮게 뒤따랐다.

“윗대의 살생이 남아 있다면 그 원망을 후손에게 물리지 마시고, 억울하게 죽은 생명의 한이 남아 있다면 오늘 이 축원을 받아 제 갈 길을 찾아가게 하십시오.”

나는 축원을 하면서도 정환의 윗대를 죄인처럼 몰아세우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뱀과 산짐승을 잡았다는 것은 확인됐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어놓고 벌을 내려달라고 빌 일은 아니었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그것이 돈이 되던 일이어서 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삶을 심판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지난 일은 지난 자리에서 끝내달라는 것.

그 흔적 때문에 살아 있는 후손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밀어내며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유진의 친정 쪽을 고했다.

“불사 가까이 살며 부처님 전에 공을 들였던 윗대 조상님들 계시면 오늘 이 자리 함께 굽어보십시오.”

둥.

“내 집 후손만 감싸려 하지 마시고, 이미 한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을 함께 살펴주십시오.”

북채를 멈췄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향 타는 냄새가 짙게 들어왔다.

촛불은 고르게 타고 있었다.

집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조상은 옳고 상대 집안 조상은 그르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런 식의 풀이를 경계했다.

유진의 친정에 불사줄이 잡힌다고 해서 정환 집안을 눌러달라고 빌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부부였다.

한쪽을 꺾어 다른 한쪽이 이기게 하는 것으로 풀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대신방울을 들었다.

짤랑.

“유진의 윗대 조상님들.”

짤랑.

“정환의 윗대 조상님들.”

방울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후손들 앞길 막지 마시고, 묵은 것이 있거든 오늘 이 자리에서 풀고 가십시오.”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의 인연으로 살게 하시고, 죽은 사람의 일은 죽은 사람의 자리에서 끝내주십시오.”

바로 그때 밖에서 바람이 한 차례 세게 지나갔다.

대숲이 크게 흔들렸다.

서걱서걱.

함석지붕 끝에서도 가벼운 떨림이 들렸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산중의 밤에는 바람이 분다.

대나무도 흔들리고 집에서도 소리가 난다.

그 모든 것을 신령의 징조라고 갖다 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대로 축원을 이어갔다.

그러다 처음 점사를 볼 때부터 정환 쪽에서 느껴졌던 거친 것이 다시 강하게 잡혔다.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스치는 듯했다.

나는 북채를 내려놓았다.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일부러 뱀을 떠올리지 않았다.

유진에게 들었던 꿈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은 채 다시 신령님께 여쭈었다.

이 집안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살생입니까.

원망입니까.

아니면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다른 사연이 있습니까.

나는 그대로 기다렸다.

잠시 뒤 짧은 말 하나가 머릿속에 강하게 들어왔다.

돌려보내라.

나는 눈을 떴다.

무엇을 돌려보내라는 것인지 곧바로 단정하지 않았다.

대신방울을 다시 들었다.

짤랑.

“어디로 돌려보내라는 말씀입니까.”

다시 여쭈었다.

그러자 뒤이어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산 사람에게 붙여놓지 말라.

죽은 것은 죽은 자리로.

산 사람의 정은 산 사람에게.

나는 그 뜻을 그대로 축원에 옮겼다.

“죽은 생명의 원망이 남았다면 본래 갈 자리로 돌려보내주시고, 산 사람의 몸에 붙어 서로를 밀어내게 하지 마십시오.”

둥.

“유진의 눈에는 정환을 정환으로 보게 하시고.”

둥.

“정환의 손길은 남편의 손길로 받아들이게 하십시오.”

나는 북을 멈췄다.

그날 축원에서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유진이 남편을 다시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것.

정환의 체취를 죽은 짐승의 냄새처럼 느끼지 않는 것.

남편의 손길을 뱀이 몸을 타고 지나가는 감각과 겹쳐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풀리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마음으로 아무리 서로를 사랑해도 부부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다시 꽹과리를 들었다.

깽.

깽.

장단을 조금 올렸다.

북도 함께 받쳤다.

둥, 둥.

“천신장군 신장대감 앞길 열어주시고, 막힌 것 걷어내주시고, 끊어질 뻔한 정 다시 이어주십시오.”

북과 꽹과리 소리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동안 축원을 이어간 뒤 장단을 서서히 낮췄다.

둥.

마지막 북소리가 길게 남았다.

꽹과리를 내려놓고 대신방울도 신명 앞에 놓았다.

유진과 정환의 이름, 그리고 부산 주소가 적힌 종이 앞에서 다시 두 손을 모았다.

“오늘 밤 두 사람이 서로를 피하지 않고 마주 앉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촛불이 작게 움직였다.

“그다음은 두 사람에게 맡기겠습니다.”

나는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절을 마친 뒤에도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자시는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부산에서도 지금쯤 유진과 정환이 내가 알려준 일을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축원 도중에 확인할 생각도 없었다.

그 밤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내가 대신할 수 없었다.

서로 마주 앉는 것.

상대의 손을 다시 잡아보는 것.

두려우면 멈추되 상대를 피해 달아나지는 않는 것.

그것은 신령도 법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산 사람들의 몫이었다.

나는 향 하나를 더 피웠다.

그리고 신명 앞에 다시 앉았다.

하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남은 것은 부산에 있는 유진과 정환에게 달려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 천신장군암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은 실제 점사와 무속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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