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제53화. 지리산의 내림굿, 그리고 아득한 안개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53화. 지리산의 내림굿, 그리고 아득한 안개

하동 깊은 산골짝에 자리한 천신장군암의 아침은 차분하고 정갈했다. 맑게 갠 하늘 아래로 이름 모를 산새들이 정겹게 지저귀고, 마당 옆을 가로질러 낮게 흘러가는 농수로에서는 졸졸거리는 청량한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김 법사는 마당 한구석 평상에 앉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햇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벼락신장님의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법당 안의 긴장감은 잠시 내려놓은 채, 산바람에 몸을 맡기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김 법사의 마음 한구석은 온전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날짜로 박선영 기주가 지리산 깊은 굿당에서 내림굿을 올렸기 때문이다. 무속에서 천존을 받아 모시는 자시(子時) 기도를 포함해 밤새 진행되었을 굿판을 떠올리며, 김 법사는 일주일 전 통화 이후 매일 아침 신당에 맑은 옥수를 올리고 향을 피우며 지극정성으로 축원 기도를 올려왔다. 한때 허주에 씐 채 신당을 시험하던 오만한 중생이었으나, 참된 신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집까지 담보 잡혀 굿당으로 향한 그 처절한 중생의 앞길에 부디 맑은 신령님의 자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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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평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들썩이며 묵직한 진동음을 내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선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선영 보살님, 마침 보살님 생각에 신령님 전 축원을 올리던 참이었습니다. 어제 굿은 잘 마치셨습니까?”
이제 내림굿을 마치고 신제자의 길에 들어섰으니, 김 법사는 자연스럽게 호칭을 ‘기주’에서 ‘보살님’으로 바꾸어 정중히 맞아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선영의 음성은 지리산의 거센 신 기운을 한껏 들이마신 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공을 떠도는 듯 아득함이 묻어났다.
“네, 법사님…… 어제 굿은 무사히 다 끝났어요. 법사님께서 매일 저를 위해 축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선영은 어제 굿당에서의 상황을 차분히 전해왔다. 내림굿이 시작되고 신장대를 거머쥐자, 감사하게도 강내림이 금방 내려 신장대를 들고 한참을 잘 뛰고 재미있게 놀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어가던 선영의 목소리에 머뭇거림과 불안함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법사님……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장대를 잡고 뛰긴 했지만 제 몸에 어떤 신명님이 확실하게 오신 건지 아직도 스스로 확신이 안 서요. 막상 굿이 다 끝나고 나니, 정작 내 몸에 내려오신 참신령님의 기운을 뚜렷하게 느껴보지는 못한 것 같거든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네. 굿이 다 끝나고 마음이 답답해서 여쭤봤더니, 신엄마님께서는 제 주장신으로 ‘별상할머니’가 들어오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신엄마님이 그렇게 알려주시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믿고는 있지만…… 제 속에서는 아직 확신(確信)이 서질 않아요. 내가 정말 신을 제대로 받은 건지, 여전히 안갯속을 걷고 있는 건지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법사님.”
선영은 내림굿이라는 거룩한 관문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의 기운을 확실히 체득하지 못한 채 ‘내가 정말 무당이 된 것인가’ 하는 깊은 의구심과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김 법사는 차잔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산골짝의 맑은 바람을 담아 진심 어린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선영 보살님, 원래 내림굿을 마친 직후에는 누구나 혼란스럽고 아득한 법입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들이는 거대한 신의 기운이 육신에 스며들었으니, 영이 안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요.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해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김 법사는 수화기 너머의 선영을 향해 묵직하게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이미 인연을 맺고 내림굿을 해주신 신엄마님을 온전히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신명님만을 바라보며 매일 신당에서 정성껏 기도를 올리십시오. 기도가 깊어지고 제자로서의 영이 깨끗해지면, 어느 날 주장신으로 오신 별상할머니께서 보살님의 꿈이나 기도를 통해 뚜렷한 공수와 신력을 보여주실 겁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면 신령님도 좌정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신엄마와 신령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법사님…… 네, 알겠습니다. 법사님 말씀 들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네요. 열심히 기도해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 법사는 농수로의 물소리를 들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신엄마가 정해주었다는 주장신,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신을 체감하지 못해 방황하는 선영 보살의 아득한 목소리가 산바람을 타고 김 법사의 귓가에 씁쓸한 잔향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다음 회에 계속)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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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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