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천지인 영감/연재 소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25화. 천문(天文)이 열리는 자시, 청배(請拜)의 불꽃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25화. 천문(天文)이 열리는 자시, 청배(請拜)의 불꽃

스스스스…….

하동 산자락의 밤은 깊다 못해 검푸른 먹물을 끼얹은 듯 적막했다. 시계 바늘이 마침내 밤 11시를 가리키며 천문이 열리는 자시(子時)의 문턱을 넘어서자, 천신장군암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땅 밑에서부터 차갑고도 거대한 영적인 기운이 소리 없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평복을 벗고 서슬 퍼런 신복(神服)으로 갈아입은 김 법사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당 앞마당으로 걸어가 깊은 땅속에서부터 맑은 기운을 품고 용솟음쳐 오르는 우물물, 즉 용수(龍水)를 정성스레 길어 올렸다. 한 가문의 불사줄을 청하고 다른 가문의 지독한 동물 부정을 쳐내기 위해선, 이 대지의 정기를 가득 담은 생명수가 필수적이었다. 신단 위에 새로이 갈아 올린 맑은 옥수 위로 촛불의 붉은 심지가 파르르 떨리며 환영처럼 일렁였다.

신단 아래 제단에는 유진과 정환, 두 사람의 영적인 결합과 조상 간의 해묵은 원한을 풀기 위한 대형 상견례 주안상이 차려졌다. 격식은 엄숙했고 차림은 지극했다.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로 소담하게 무쳐낸 삼색 나물과 기름내를 풍기며 노릇하게 지져낸 삼색전, 우주의 음양을 뜻하는 삼색 과일이 붉은 제기 위로 둥글게 쌓였다. 그 중심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두툼한 돼지고기 수육과, 마치 살아 움직일 듯 꼬리를 치켜세운 붉고 커다란 도미 한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인간의 눈에는 그저 화려한 제사상이었으나, 신과 영가의 눈에는 피 튀기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차려진 위태로운 평화의 회담장이었다.

김 법사가 마침내 신단 앞에 서서 커다란 북채를 쥐었다.

둥! 둥! 두둥- 둥둥!

묵직한 북소리가 양철지붕을 뒤흔들며 깊은 계곡 안개 속으로 찌르듯 퍼져나갔다. 뒤이어 사방의 적막을 찢어발기는 괭과리 소리가 사정없이 얹어졌다.

캥! 꺵! 캥- 개갱- 깽깽!

숨 가쁘게 들이치는 북과 괭과리의 웅장한 합방 고장 소리가 천신장군암의 기도도량을 터질 듯이 채워 나갔다. 고장 소리가 빨라질수록 신당 안의 온도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타오르던 향연(香煙)은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간의 오감을 마비시킬 듯한 거대한 진동 속에서, 마침내 김 법사의 입이 열리며 양가 조상을 불러들이는 청배(請拜)의 축원이 터져 나왔다.

“오냐! 천문이 열리고 지호가 열리는 자시 한밤중에, 경상도 하동 땅 천신장군암 도량으로 영남의 자손 유진과 정환의 만조상님들은 일체 차례로 하강하소사! 친정 가문의 맑고 정갈한 불사 조상님네들, 하얀 고깔 소복 차림으로 옥수 받들고 강림하시고! 시댁 가문의 피 흘리던 동물 부정 맺힌 짐승 영가들과 매듭진 조상님네들, 원한의 사슬을 풀고 이 도량으로 속히 발길을 인도하소사!”

콰르릉-!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치듯, 신당의 거대한 나무문이 거센 바람에 덜컥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그 찰나의 순간, 신당 안의 시퍼런 불빛을 타고 양쪽의 거대한 그림자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며 몰려들었다.

유진의 친정 가문 조상들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고깔을 쓰고 정갈한 소복을 입은 노인들과 여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하고 명징한 기운을 뿜어내며 제단 한쪽을 채웠다. 그들의 몸에선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맑은 향내와 옥수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 반대편 어둠 속에서 역겨운 흙비린내와 핏자국을 덕지덕지 묻힌 사내들의 환영이 기어 나왔다. 정환의 시댁 조상들이었다. 도끼와 칼을 쥔 손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고, 그들의 발밑에는 목이 잘린 구렁이의 영가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사슬처럼 엉켜 있었다. 지독한 동물 부정이 만들어낸 시커멓고 탁한 원한의 폭풍이 신당을 집어삼킬 듯 요동쳤다.

양가의 조상들이 마침내 김 법사가 마련한 거대한 주안상 앞에 마주 서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없었다. 상견례를 위해 마련된 진수성찬을 마주한 양측 조상님들은, 서로를 향해 차가운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등을 돌려 앉아 버렸다. 친정의 맑은 불사 조상들은 더러운 피비린내를 풍기는 시댁 영가들을 향해 고결한 옷자락을 걷어쥐며 외면했고, 시댁의 부정 맺힌 영가들은 이빨을 갈며 친정 조상들의 맑은 양기를 향해 저주 어린 쉭쉭 소리를 내뱉었다.

상을 가운데에 두고 차갑게 등을 돌려앉은 두 가문의 영혼들. 그 팽팽한 대치 상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살기가 신당의 촛불들을 단숨에 파란색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같은 시각, 부산의 안방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유진의 운명을 건 영적 전쟁의 서막이 이곳 하동에서 가파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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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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