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제55화. 천존기를 걸었건만, 무너지는 마지막 희망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55화. 천존기를 걸었건만, 무너지는 마지막 희망

신당 기물 조성을 마치고 며칠 뒤, 낡은 단독주택 방 한 칸에서 박선영 보살의 신당 ‘좌정식(座定式)’과 ‘점안식(點眼式)’이 올려졌다.
이날 신엄마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지리산 내림굿날 징과 북을 치며 목청 높여 축원을 적어 내려가던 법사 한 분을 모시고 나타났다. 신엄마는 각 신명님의 기운이 서린 엄숙하고 화려한 신명의대(神明衣帶)를 정갈하게 갖춰 입었고, 법사의 칼날 같은 고장 소리와 묵직한 축원 속에 탱화 속 신령님의 눈에 붓으로 먹을 찍어 영을 살리는 점안을 올렸다. 이어 불단 위에 모셔진 놋그릇과 기물마다 신위(神位)가 바르게 좌정하도록 정성껏 축원을 읊조렸다. 빚을 내어 바친 거액의 비용만큼이나 의식은 차분하고도 엄중하게 치러졌다.
모든 의식이 끝난 뒤, 신엄마와 법사는 낡은 주택 옥상으로 올라가 신당을 세상에 알릴 깃발들을 세웠다. 무속에서는 신당의 정기를 바로잡고 신령의 통로를 열기 위해 옥상이나 높은 곳에 세 가지 중요한 기(旗)를 대나무 끝에 한데 묶어 세운다.
하늘의 천신령님과 천궁의 기운을 받드는 흰색의 ‘천존기(天尊旗)’, 산천의 정기와 장군님의 위엄을 뜻하는 붉은색의 ‘산신기(山神旗)’, 그리고 대대로 내려온 핏줄과 조상 선영의 줄기를 잇는 황색과 오색의 ‘조상기(祖上旗)’였다. 대나무에 단단히 묶인 세 가지 색의 깃발이 산바람을 타며 하늘 높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이는 하늘에 “이곳에 신제자가 뿌리를 내렸노라” 고하는 성스러운 표식이자, 사바세계의 수많은 중생들에게 길을 비추는 표지판이었다.
삐걱거리는 옥수관 기와 지붕 위로 천존기와 산신기, 조상기가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며, 선영 보살은 불단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스레 합장을 올렸다.
‘신령님…… 제 온 재산을 바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차린 신당입니다. 부디 이 불쌍한 자손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맑은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점사 손님들 많이 들게 하시어 지은 빚도 어서 갚게 해주시고, 신제자의 길을 걸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어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선영은 굳게 다짐했다. 비록 시작부터 엄청난 금전의 풍파를 겪고 빚더미에 나앉았지만, 참된 제자가 되어 손님들의 가슴 막힌 사연을 시원하게 풀어가다 보면 신령님의 보살핌 속에 빚도 청산하고 제자로서 바로 설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절벽 끝에 선 선영이 품은 마지막 희망이자 생존의 이유였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옥상에 깃발을 걸어두고, 매일 새벽 맑은 옥수를 새로 올리며 향을 피우고 촛불을 밝혀 기도를 올렸지만 며칠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신당의 문고리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골목길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 점사를 보러 찾아오는 손님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대출 이자 독촉 전화는 매섭게 걸려왔고, 텅 빈 신당 안에서 향 연기만 우두커니 바라보는 선영의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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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함과 공포를 견디다 못한 선영은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님 점사는 어떻게 가르쳐주시는지, 손님이 안 들 때는 제자가 어떤 기도를 올려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구르르, 구르르…… 신호음만 한참을 울리더니 어김없이 음성메시지로 넘어갔다.
두 번, 세 번을 다시 걸고 나서야 간신히 수화기 너머로 신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전처럼 돈을 요구할 때의 친절함은 온데간데없이 신경질적이고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아이고, 선영아. 내가 지금 다른 지방에 굿 들어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니까. 제자가 신당을 차렸으면 스스로 기도해서 신령님한테 답을 찾아야지, 매번 나한테 전화해서 징징대면 어쩌니? 나 나중에 전화할 테니까 기도나 열심히 해.”
탁-!
선영이 제대로 된 하소연 한마디 건네보기도 전에 전화는 차갑게 끊겨버렸다.
신엄마의 피하는 듯한 냉랭한 태도와 차갑게 잘려 나간 통화음. 선영의 손에서 휴대폰이 스르르 떨어졌다.
거액의 굿값과 신당 조성비, 그리고 좌정식 비용까지 싹 다 빨아먹은 신엄마는 정작 신송아지 제자가 빚더미 위에서 말라 죽어가든 말든 까마득하게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신령님, 제발 답 좀 해주세요…… 제발…….”
어스름한 저녁, 촛불만 넘실거리는 신당 차가운 장판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선영 보살은 꺼꺼 울음을 터뜨렸다. 세 가지 색의 깃발은 바람에 가련하게 펄럭였지만, 신엄마에게 버림받고 빚더미에 홀로 남겨진 그녀의 마음은 마침내 비참하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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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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