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24화. 세 가지 비방, 목숨을 건 금기(禁忌)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24화. 세 가지 비방, 목숨을 건 금기(禁忌)

낡은 목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법당 안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압박감으로 내려앉았다. 유진은 침을 꿀컥 삼키며 목함 속을 들여다보았다. 비단 천 위에 놓여 있는 것은 화려한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묘하게 마른 식물 줄기와 거친 무명천, 그리고 시퍼런 날이 선 작은 식도(食刀) 한 자루였다.
김 법사는 먼저 허연 빛깔이 도는 바짝 마른 나무 줄기더미를 가리키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백마목(白馬木)이라 불리는 마른 엄나무 줄기입니다. 서방이 오늘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 보살님이 먼저 안방 침대 네 모서리와 거실 구석구석에 이 마른 줄기를 짓이겨 즙을 뿌리셔야 합니다. 뱀은 가시 돋친 나무의 영적 기운을 가장 무서워하는 법. 시댁 조상들이 찢어 죽인 뱀들의 원한이 서방의 핏줄을 타고 안방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을 문턱에서부터 단칼에 차단하는 결계입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 법사의 말을 머릿속에 뼈저리게 새겨 넣었다. 김 법사의 주름진 손가락이 이번에는 붉은 실로 꽁꽁 묶인 거친 황토색 무명천 뭉치로 향했다.
“두 번째는 서방의 기운을 정화할 황토 무명천입니다. 오늘 밤, 서방과 함께 안방에 마주 앉으십시오. 그리고 서방의 상의를 전부 벗긴 뒤, 이 황토 천으로 사내의 등줄기와 명치 부근을 살이 벌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거칠게 쓸어내려야 합니다. 뼛속에 스민 파충류의 비린내와 바깥에서 묻혀온 더러운 색귀의 찌꺼기를 피부 밖으로 강제로 끄집어내는 의식입니다. 이때, 서방이 아무리 뜨겁다거나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도 절대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멈춘다면 끄집어내던 부정 줄력이 서방의 심장을 마비시킬 수도 있어요.”
“심장마비요……?”
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단순한 미신인 줄 알았던 비방이, 부부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위험천만한 영적 수술과 다름없다는 사실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김 법사는 유진의 겁먹은 눈을 엄하게 쏘아보며 마지막으로 목함 속의 시퍼런 식도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고 위태로운 금기(禁忌)입니다. 보살님의 맑은 불사줄과 서방의 부정 섞인 양기가 마주치면 필연적으로 온몸이 뒤틀리는 거부 반응이 오겠지요.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서방의 손길이 뱀 비늘처럼 차갑고 구역질이 나더라도, 이 악물고 사내의 품을 온전히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부부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뜨겁게 살을 섞는 극(極)의 순간, 서방의 몸에서 빠져나온 뱀의 악귀가 보살님을 집어삼키려 달려들 것입니다. 그때 침대 머리맡 이불 밑에 숨겨둔 이 식도를 단숨에 뽑아 허공을 향해 세 번 거칠게 휘두르며 ‘물러가라!’고 외치셔야 합니다.”
김 법사는 식도를 유진의 손에 쥐여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음성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만약 무섭다고 중간에 서방을 밀쳐내거나 식도를 휘두르지 못한다면, 그 뱀의 원한은 보살님의 목줄을 감아 영영 미쳐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음과 양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그 짧은 찰나에 모든 승부가 갈립니다. 보살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유진은 손바닥을 파고드는 차가운 칼자루의 감촉을 느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만큼 거대한 공포가 명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틈새를 뚫고, 간절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치듯 쏟아져 들어왔다.
결혼 전, 그저 멀리서 정환의 넓은 어깨만 보아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설레던 날들이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향할 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다정했던 사내. 결혼식 날, 유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평생 눈물 흘리게 하지 않겠다던 정환의 단단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눈만 마주치면 아랫배가 뻐근해지도록 서로를 원했고, 밤새도록 숨이 막힐 듯이 살을 섞으며 온기를 탐했던 그 눈부시던 신혼의 침실. 그 달콤했던 남편의 살내음과 뜨거웠던 사랑을 유진은 이대로 영영 잃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홀로 안방에서 썩어가던 그 사람을, 더러운 색귀의 구렁텅이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내가 버텨야 그 뜨거웠던 날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었다.
유진은 눈을 번쩍 뜨며 식도를 품에 꼭 안았다. 휑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거칠고 단단한 결의가 핏빛처럼 타올랐다.
“하겠습니다, 법사님.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내서 내 남편, 제 손으로 다시 살려내겠습니다.”
김 법사는 강단 있는 유진의 태도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단 위에서 하얀 백지와 붓을 끌어당겼다.
“오냐, 여자가 독을 품었으니 신령님도 외면치 않으실 게다. 자,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오늘 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음과 양의 기운이 가장 맹렬하게 교차하는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서방과 잠자리를 하셔야 합니다. 보살님이 안방에서 목숨을 걸고 그 사내를 받아내는 그 시각, 나 역시 이곳 신당에서 보살님 가문의 불사줄을 청해 서방 몸에 스민 지독한 뱀 부정과 동물 부정을 단칼에 쳐낼 게요. 안과 밖에서 동시에 쳐야 이 지독한 업이 끊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두 사람이 살고 있는 부산 집 주소를 이 축원장에 정확하게 적으십시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붓을 쥐고 아파트 동·호수까지 명확하게 축원장에 새겨 넣었다. 글자가 완성되자 김 법사는 그것을 고이 접어 신단 촛대 밑에 밀어 넣었다.
모든 공수와 지시가 끝나자, 유진은 가방을 뒤적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터넷에서 용한 무당들은 부적 한 장, 비방 하나에도 수백 수천만 원을 요구한다는 글을 수없이 보았기에 가슴이 졸여왔다.
“법사님…… 저, 비용은 어떻게 정산해 드려야 할까요? 대기업에 다녀도 요새 가계가 많이 기울어서 대형 굿을 할 만한 큰돈은 당장 융통하기가 어려운데…….”
유진의 말에 김 법사는 허허롭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돈에 눈이 먼 장사꾼 무당의 탐욕 따위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살님, 천신장군암은 인간의 피눈물을 짜내어 돈을 긁어모으는 장터가 아닙니다. 굿할 필요도 없고, 비방 물건값도 받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오늘은 그저 멀리서 오셨으니 점사비 딱 십만 원만 내고 가세요.”
“예……? 정말, 정말 그것만 내도 되나요?”
유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김 법사는 유진의 마른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며 다독였다.
“돈은 서방님이 정신을 차리고, 두 분 안방에 다시 예전처럼 뜨거운 온기가 돌 때 쓰십시오. 내 말대로 비방을 무사히 마치고 정말 효험이 있거든, 그때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이 신당에 와서 신령님 앞에 단돈 몇 만 원짜리 촛값이라도 올리시면 됩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당장 부산 집으로 내려가거라. 해가 지고 서방이 문을 열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김 법사의 따뜻하면서도 엄숙한 배웅을 받으며 유진은 목함을 품에 안고 신당을 뛰쳐나왔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는 유진의 등 뒤로, 하동 산자락의 하늘이 붉고 탁한 핏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투를 벌여야 할 자시(子時)를 향해, 폭풍전야와도 같은 잔인한 밤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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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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