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천지인 영감/연재 소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30화. 어둠 속의 속삭임, 흉가에서 찾아온 그림자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30화. 어둠 속의 속삭임, 흉가에서 찾아온 그림자

“법사님, 제발 우리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저러다 애가 정말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저는 못 삽니다…”

지리산 자락을 넘어온 거친 칼바람이 경남 하동 산자락에 위치한 천신장군암의 낡은 양철지붕을 덜커덩거리며 흔들었다. 빛바랜 붉은 깃발이 대나무 장대 끝에서 비명처럼 나부끼는 도량 안. 백자 대접에 담긴 옥수가 파르르 떨릴 때마다, 마주 앉은 중년 여인의 어깨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쥔 손수건은 이미 눈물과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찻잔을 감싸 쥔 김 법사의 손길은 차분했다. 대전과 대구, 진주 같은 거친 대도시의 바닥에서 삼십 년 세월 동안 온갖 인간 군상의 비극을 목도해 온 그였다. 삼 년 전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이곳 하동의 외딴 양철지붕 집으로 들어와 오직 기도에만 몰두해 왔지만, 자식을 둔 부모의 끊어질 듯한 애간장만큼은 언제 마주해도 가슴이 저려왔다. 법사는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연(香煙) 너머로 여인을 바라보며, 낮고 인자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멀리 사천에서 이 깊은 산골까지 찾아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따뜻한 차 한 모금 축이시고,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셔요. 신령님 전(前)에 고하지 못할 사연은 없는 법입니다. 고3이면 한창 예민하고 밤낮으로 서책과 씨름할 시기인데, 아드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극진한 존칭과 따뜻한 눈빛에 여인은 간신히 가슴을 짓누르던 숨을 토해냈다. 불과 한 달 전, 평화롭던 모자의 일상을 송두리째 찢어놓았던 그날 오후의 전화 한 통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 민우(가명)는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성실한 아이였다. 대입 스트레스로 얼굴이 반쪽이 되면서도 군소리 없이 독서실 불을 밝히던 아들이었기에, 어머니는 그저 대견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늦은 밤 마중을 나가는 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진동음이 가방 속에서 울렸다. 액정 화면에 선명하게 찍힌 이름은 민우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아, 민우 어머니십니까. 일하시는 중에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요즘 민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 선생님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듯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불길한 예감은 척추를 타고 서늘하게 올라왔다. 혹시 아이가 입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무슨 일인가요? 우리 민우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어머니, 실은… 요즘 민우가 수업 시간에 도저히 집중을 못 합니다.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다가도, 갑자기 두 손으로 귀를 거칠게 틀어막고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괴로워해요. 어제는 수학 수업 도중에 갑자기 일어서더니, 귀에서 자꾸 누가 기분 나쁘게 속삭인다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허공에 대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교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선생님의 이어지는 고백은 어머니의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아이의 이상 증세는 일시적인 헛소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느라 피로가 쌓여 환청이 들리나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집니다. 이제는 혼자 칠판을 보며 안색이 흙빛이 되어 중얼거리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화를 내기도 해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짝꿍이나 친구들마저 민우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슬슬 피하며 멀리하는 분위기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가고 있어요, 어머니.”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담임 선생님의 깊은 한숨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어머니의 심장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아이 건강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거나 극심한 슬럼프가 온 것 같으니, 내일은 학교를 하루 쉬게 하시고 큰 병원에 데려가셔서 정신과 정밀 검사라도 한번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병원에 가보라는 권유를 끝으로 통화는 끊겼지만, 어머니는 일터의 딱딱한 의자에 주저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덜덜 떨렸고, 귀에서는 이명 같은 웅웅거림이 맴돌았다. 세상 무엇보다 바르고 착했던 내 아들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민우의 맑은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한, 거대하고 탁한 어둠의 서막에 불과했다.

(다음 회에 계속)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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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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