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천지인 영감/연재 소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39화. 고를 풀고 한을 씻다, 어둠에서 빛으로 (에피소드 최종 완결)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39화. 고를 풀고 한을 씻다, 어둠에서 빛으로 (에피소드 최종 완결)

“어머니, 아이 몸은 이제 깨끗해졌으니 걱정 마셔요.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듯 잡귀하고 한 약속이라도 무당이 신령님 전에서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후환이 없습니다. 큰돈 들이는 굿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시장에서 파는 망자용 한복은 아주 저렴하고, 간단한 술상 차리는 것도 비용이 얼마 안 드니 날을 잡아서 가시는 길 배불리 먹여 보냅시다.”

김 법사는 법당을 나서는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하며 배웅했다. 귀신을 떼어냈다고 끝이 아니라, 망자와의 신의를 지켜야만 진정으로 민우의 뒤끝이 정골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하동 산자락의 대지가 깊은 정적에 잠긴 자시(子時). 김 법사는 차가운 한기가 감도는 법당에 홀로 앉아 벼락신장님 전에 향을 피우고 깊은 기도에 들었다. 붉은 촛불이 은은하게 일렁이는 신당 안에서 신령님의 공수를 받아 내린 뒤, 이튿날 아침 일찍 민우 어머니에게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니, 김 법사입니다. 신령님 전에 여쭈어 음양의 기운이 가장 맑게 떨어지는 오일 뒤로 날을 잡았습니다. 제물로 올릴 정갈한 과일과 고기, 막걸리 몇 병에 망자용 한복 한 벌까지 해서 비용은 딱 삼십만 원만 준비하셔요. 양심껏 신의 길을 걷는 제자이니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습니다. 그날 민우와 함께 깨끗한 마음으로 올라오십시오.”

삼십만 원이라는, 요즘 세상에 상상도 못 할 만큼 소박한 비용에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깊은 감사와 안도의 눈물이 배어 있었다.

닷새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었다. 한결 안색이 맑아진 민우와 어머니가 법당에 들어서자, 김 법사는 미리 준비해 둔 하얀 소복 모양의 망자용 한복을 제단 옆에 정갈하게 올려두었다. 점상 위에는 삼십만 원으로 정성껏 마련한 막걸리와 따끈한 밥, 고기 냄새가 향연과 섞여 달콤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 법사는 품에서 두툼한 네임펜을 꺼내 한지에 망자의 한 맺힌 사연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제단 앞에서 벼락신장의 신력이 깃든 신장칼을 비껴 쥐고, 길게 늘어뜨린 거친 삼베와 무명필로 된 ‘길베’를 마당 한복판에 길게 늘어뜨렸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혼의 길이자, 맺힌 한을 풀어내는 씻김의 무대였다.

“오일 전 약속을 지키려 계룡산 벼락신장 제자가 이 자리를 마련했으니, 그 폐가에 묶여 피눈물 흘리던 영가시여, 망설이지 말고 이 도량으로 하강하소서!”

쉬이익! 탁!

김 법사가 신장칼로 공중을 가르며 늘어진 길베를 향해 매섭게 전진했다. 칼끝이 삼베의 팽팽한 결을 서걱 소리를 내며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이는 망자가 이승에 두고 간 징글징글한 원한과 고(結)를 칼로 끊어내어 해원(解冤)하는 무서운 의식이었다.

스스스스-

길베가 찢어지는 순간, 법당 안의 촛불이 일제히 푸른빛을 띠며 흔들렸고, 마당 한구석으로 퀴퀴하고 차가운 음기가 스멀스멀 소환되어 내려앉았다. 민우의 몸에서 빠져나와 공중을 떠돌던 그 삼베옷을 입은 할아버지 지박령의 원혼이었다. 노인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들이닥쳤으나, 제단 가득 차려진 따뜻한 고기 향과 막걸리를 보더니 이내 마른침을 삼키며 상 앞으로 다가갔다.

인간에게 버림받고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 누구도 대접해 주지 않았던 허기진 영혼. 지박령은 김 법사가 정성껏 권하는 막걸리와 밥을 허겁지겁 받아먹으며, 가슴에 맺혔던 서러운 통곡을 눈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대접에 노인의 서슬 퍼런 악독함이 봄눈 녹듯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영가시여, 이승의 묵은 때와 자식에 대한 원망은 이 밥상에 다 묻어두고, 이제 깨끗한 옷 갈아입고 좋은 곳으로 가소서.”

김 법사의 나지막한 축원과 함께, 어머니가 마당 화로에 하얀 망자용 한복을 넣고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한복이 재가 되어 날아갈 때, 기적이 일어났다.

시커먼 악기로 가득 차 얼룩덜룩했던 노인의 형상이 순간 빛에 씻기듯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때가 꼬질꼬질하던 삼베옷은 온데간데없고, 방금 화로에 태운 눈부시게 하얗고 깨끗한 한복을 차려입은 인자한 노인의 모습이 허공에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일그러졌던 얼굴은 평온함을 되찾아 빛나고 있었다.

대접을 받아 한을 풀고 마침내 깨끗한 망자의 신령으로 거듭난 노인은, 제단 앞에 서 있는 김 법사를 향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삼배(三拜)를 올렸다. 구천을 떠돌던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바른 길을 열어준 신제자에게 바치는 지극한 감사의 표시였다. 삼배를 마친 노인의 영혼은 이윽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하얀 연기와 함께 하늘을 향해 은은하게 흩어져 천도(薦度)되었다.

하동 산자락의 양철지붕 위로 가을날의 정골한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쬐었다. 마당에 선 민우와 어머니의 얼굴에는 더는 어둠의 그림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한 존재의 서글픈 한을 달래어 저승으로 인도한 천신장군암의 무서우면서도 자비로운 신력은 그렇게 깊은 구원의 여운을 남긴 채 아름답게 막을 내렸다.

(에피소드 완결)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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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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