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천지인 영감/연재 소설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제49화. 열린 귀문(鬼門), 신바람인가 허주인가

[연재] 신과 인간 사이 천신장군암 점사록

제49화. 열린 귀문(鬼門), 신바람인가 허주인가

신장칼에 쪼개진 허주의 형상이 재가 되어 사라지자, 법당 안을 짓누르던 썩은 기운도 서서히 걷혔다.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내쉬던 박선영 기주는 한참 뒤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찢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의 손톱자국과 땀에 젖은 몰골은 참혹했지만, 죽어가던 동공에는 비로소 맑은 제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김 법사는 점상 아래 보관해 두던 깨끗한 흰 광목천을 꺼내 선영의 헐벗은 어깨와 상체를 덮어주었다. 선영은 서럽고 부끄러운 눈물을 흘리며 광목천을 꼭 움켜쥐었다.

“법사님…… 저 이제 살았나요? 그 징그러운 귀신 놈 완전히 나간 건가요?”

김 법사는 묵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30년 내공의 제자 눈에는 허주가 빠져나간 그녀의 몸 상태가 더 큰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기주님, 급한 불은 껐으나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기주님의 몸은 귀문(鬼門)이 훤하게 열려버렸습니다.”

“귀문이요……?”

“그렇습니다. 이미 온갖 잡귀의 수라장에 노출되어 영혼의 문고리가 부서진 상태입니다. 귀문이 열린 육신은 또 다른 잡귀나 원혼이 빈집 안방 들르듯 범접하기 아주 쉬운 상태지요. 게다가 이런 몸은 조상 줄에서 치고 내려오는 ‘신바람(神風)’마저 휘몰아치기 쉬운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때였다. 김 법사가 다시 옥수를 올리고 방울과 부채를 들어 가볍게 흔들자, 찌르르한 영기(靈氣)가 신당 안을 감쌌다. 김 법사의 입에서 인자하면서도 묵직한 조상 공수가 터져 나왔다.

“어라, 이 자손 보소! 내 할머니 줄에서 비나리 치던 소리가 내 귀에 쩌렁쩌렁 들리는구나! 대대로 칠성 줄이 중하고 공줄이 깊은 집안이로다. 상덕을 쌓고 칠성전에 명을 빌어 자손을 이어왔건만, 정작 자손이 제 줄기를 모르고 허주에 헛눈을 팔았으니 조상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구나!”

신의 공수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선영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억눌렸던 눈물이 와르륵 쏟아졌다. 그녀는 무언가 번뜩 깨달았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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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님…… 생각해보니…… 제 외할머니가 옛날에 시골 동네에서 소문난 분이셨어요. 신내림을 정식으로 받으신 건 아니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답답한 일 있을 때마다 찾아오면 쌀점을 쳐주시고 공수를 내주곤 하셨거든요. 어릴 때 외할머니 집에 가면 늘 향 냄새가 났었어요…….”

선영의 고백에 김 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로 칠성 공줄을 이어온 집안의 내력이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조상의 맑은 칠성 줄을 타고 태어난 자손이 제 본분을 모르고 오만하게 굴자, 허주가 그 공줄의 틈새를 치고 들어와 그녀의 삶을 유린했던 것이었다.

김 법사는 점사노트를 가볍게 두드리며 엄중하게 말을 이었다.

“기주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외할머니의 공줄을 이어받아 귀문이 열렸다고 해서 무턱대고 신을 받아야 하는 ‘신가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진짜 신령님이 오시려고 내리는 신바람인지, 아니면 그저 귀문이 열려 허주가 계속 치고 들어오기 쉬운 불쌍한 몸뚱이일 뿐인지 확실하게 ‘가림(神檢)’을 해보아야 합니다.”

김 법사는 선영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속에서 가림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가장 신중한 처방입니다. 만약 진짜 신바람인데 신을 받지 않고 무턱대고 쳐내기만 하면 인생의 풍파가 멈추지 않을 것이요, 반대로 그저 허주에 흔들린 몸인데 섣불리 신굿을 해버리면 평생 허주를 모시는 가짜 무당이 되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맑은 날을 잡아 칠성전 비나리와 함께 기주님의 영을 정화하고, 신인가 허주인가를 명확히 가려내는 정화 치성을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주님, 명심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 김 법사는 삼십 년간 신령님을 모셔왔지만, 내 욕심으로 제자를 거둘 능력도, 힘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가림을 해서 잡귀를 털어내고 기주님의 영을 바르게 짚어드릴 수는 있으나, 설령 진짜 신의 줄기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내가 직접 신내림굿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자의 인생을 평생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업(業)이기 때문입니다.”

김 법사는 따뜻하면서도 엄중하게 권유를 덧붙였다.

“치성을 통해 영을 깨끗이 가려낸 뒤, 만약 참신령님의 바람이 맞다고 나오면 그땐 덕망 높고 바른 신선생님을 찾아가 인연을 맺고 내림굿을 잘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기주님이 살 길입니다.”

자신이 왜 그토록 방황하고 허주에 시달려야 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깨달은 선영은, 헛된 욕심이나 사리사욕 없이 오직 제자의 길을 진실하게 일러주는 김 법사의 성품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선영은 흰 광목천을 꼭 쥔 채, 김 법사 앞에 엎드려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오만함과 미련이 완전히 씻겨 나가고, 마침내 참된 신의 이치와 진정한 제자다운 위엄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글쓴이 계룡산 벼락신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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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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